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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살의 자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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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병훈 작성 1,977 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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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악수필) 마흔살의 자서전

이 병훈

한 겨울 천황산 계곡에 골을 타고 얼음바람이 몰아친다.

홍룡폭포의 빙벽아래서 내 빰을 치고 가는 바람을 느끼며 잠시 상념에 시공간을 헤메인다. 오래전 우리는 이곳에서 캠프를 치고 꿈을 함께하며 빙벽훈련을 했다.

히말라야 원정등반이라는 과제를 두고 모두들 한마음으로 훈련에 몰두하였다. 이곳에서 내 자일 파트너였던 그녀는 암벽등반대회에서 몇 차례 우승을 하였고 히말라야 등반도 다녀온 당찬 산꾼이다. 나를 선배네 오빠네 하며 따르며 우리 팀에 헌신하는 열성적인 여성산악인이다. 나는 후배들과 안나푸로나 정상에 오르기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등반준비에 열정적으로 뛰던 시절이다.


어려운 여건속에서도 대원들을 다독이며 의욕과 용기를 심어주고 겨울훈련으로 설악산 토왕성폭포 한라산 왕관릉 지리산 불일폭포를 섭렵하며 훈련과 연습에 매진하였다. 밖으로는 히말라야 원정등반에 필요한 경비를 조달하기 위해 동분서주 뛰어다니며 기업에 섭외를 하고 산악계에 협조도 구하였다.


학창시절엔 나는 백마 탄 왕자가 될 수 있을 거라는 꿈을 가졌었다. 어려운 환경과 힘든 여건이지만 난 늘 성공을 자신하고 황금마차를 타고 달리는 개선장군이 되는 꿈을 꾸었다. 그러다, 젊은 시절 나는 산악운동에 빠져 있었다. 늘 뜻대로 되지 못했던 백마 탄 왕자의 꿈은 현실과 달랐고 허탈과 좌절에 내 몰렸다.


처음엔 그냥 산이 좋아 산에 다니다가 뒤늦게 산악운동의 의미와 가치를 깨닫게 되었고 순수등반의 더 높은 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열심히 뛰고 공부하며 모든 정열을 쏟았다. 어려운 여건에서도 동지들과 함께 암벽등반의 매카라는 스위스의 알프스 북벽과 미국의 요세미티 하프돔, 일본의 동계 북알프스를 다녀오기도 했다.


오랫동안 준비하여 우리 팀은 결국 네팔 히말라야 안나푸로나 카라반에 들어갔고 오직 정상에 오르는 것이 목표였다. 나의 유일한 여성 자일파트너였던 그녀는 언제나 묵묵히 내 곁을 지키고 있었다. 안나의 카라반은 힘들었지만 신이 났었고 꿈을 향한 행군은 계속되었다. 베이스캠프에 도착한 우리 팀은 등반준비를 위해 전열을 가다듬고 루트 정찰에 들어갔다. 전진 캠프를 치며 올랐고 등반은 비교적 순조로웠다. 그러나 마지막 정상공격을 앞두고 우리에게 힘겨운 시련이 찾아왔다. 안나의 하늘에 먹구름이 끼이는가 싶더니 세찬 눈보라가 몰아치기 시작하였고 그런 악천후는 연일 쉬지 않고 일주일동안 멈추지 않았다. 세찬 바람과 눈보라 그리고 눈사태까지 일어나니 꼼짝없이 천막을 지키며 기동도 못한 채 갇혀있었다. 준비한 식량과 연료도 얼마 남지 않았고 대원들은 극도의 피로와 긴장감으로 초조해지고 몇 사람은 탈진상태로 막내 종철이는 고소증세로 최악의 상황이 되어 있었다.


난 등반의 책임자로서 진퇴양난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가 막막하여 밤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눈이 멈추던 날 캠프4에 있던 현희에게서 무전이 왔다.

오늘 날씨가 개였으니 자기가 정상공격에 나서 보겠다는 것이었다. “안 돼, 위험해” 나는 반대했다. 그러나 그녀는 완강하게 나섰다. 지금 상황에선 별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이었다. 몇 해를 준비한 원정대가 이대로 돌아 갈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캠프4에서 폭설에 눌려 일주일을 묶여 있었다.

이제 식량도 바닥이 났다며 여기서 절대로 포기 할 수 없다고 했다. 그래도 난 안된다고 말렸다. 한참을 말없이 침묵하다가 무전은 끊겼다. 나는 포기하고 후퇴 할 것인가 무리해서라도 공격을 시도 할 것 인가의 막바지 기로에 서 있었다. 잠시 후 다시 현희의 무전이다. 무조건 오르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한참을 망설이다 결국, 그러면 장비와 식량을 잘 챙겨서 조심해서 오르되 절대로 무리는 하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그러나, 막상 허락은 하였지만 불안하고 초조하였다. 캠프3에 남아 있던 두 명의 대원에게 공격조를 스포트하라고 하였다.


가슴을 조이면서 산만 바라보며 일곱 시간쯤 지났을까. 현희의 무전 연락이다.

“대장님, 여기는 정상입니다. 도착했어요.”라고 반가운 목소리가 울렸다.

나는 정말 좋았다. “수고했어” 조심해서 안전하게 내려오라고 했다

그러나, 그 때 들은 그 목소리가 그녀의 마지막 음성이 될 줄이야. 그녀는 하산하며 트레버스에서 미끄러져 수백미터 아래로 떨어졌다. 뒤에 스포트하던 대원들이 발견하고 캠프에 알려왔다.


산이 좋아 산에 가게 된 그녀를, 그리고 묵묵히 나를 따르던 그녀를, 결국 안나의 등반에서 영원히 잃어버린 나는, 모든 삶의 의욕을 잃어버리고 한동안 방황하며 삶을 포기하고 사람들과의 만남도 피했다. 그냥 허무하고 허탈하고 죄스럽고 내가 왜 사는지를 몰랐다. 그러나 해마다 차가운 얼음 바람이 불어오면, 나는 이곳 홍룡폭포를 찾아와 그녀와 꿈을 나누며 훈련하던 때를 회상하며 기도한다. 나는 이제 정말 어디로 가야 하는가! 그리고 현희야! 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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